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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신라의 천년 고도.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첨성대와 불국사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황남빵이다. 작고 동글한 빵 속에 팥앙금이 가득 찬 이 과자는 단순한 간식을 넘어 경주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특별한 존재다. 오늘은 황남빵의 기원부터 지금까지, 그 달콤하고도 깊은 이야기를 풀어본다.

     

     

    경주 황남빵경주 황남빵 속포장지경주 황남빵 실물모습

     

     

    1939년, 황남동에서 시작된 작은 꿈

     

    황남빵의 이야기는 1939년, 일제강점기의 경주 황남동에서 시작된다. 당시 21세의 청년 최영화는 조상 대대로 팥으로 떡과 과자를 만들어 먹던 집안의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려운 시절, 밀가루와 팥 같은 재료는 귀했고, 빵을 만드는 일은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영화는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으로 밀가루 반죽에 계란을 섞고, 팥앙금을 듬뿍 넣은 독창적인 빵을 완성했다. 이 빵은 황남동에서 팔리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황남동 빵”이라 불리게 되었고, 마침내 황남빵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최영화의 황남빵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었다. 일본의 와가시(和菓子)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독창적인 창작물이었다. 둥글고 납작한 반죽 위에 국화 문양을 찍어 멋을 낸 황남빵은 부드러운 식감과 달콤한 팥앙금으로 단숨에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련과 부활: 황남빵의 굴곡진 여정

     

    그러나 황남빵의 역사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1930~40년대, 전쟁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빵집 운영은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최영화는 폐업과 재개를 반복하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5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정적인 자리를 잡았다. 그의 끈질긴 노력과 “절대 품질을 타협하지 않는다”는 철학은 황남빵을 경주의 대표 먹거리로 만들었다.

     

    1978년, 최영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최상은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최상은은 황남빵을 단순한 지역 특산품에서 전국적인 명물로 키워냈다. 1987년 상표 등록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현재의 황남빵 본점 자리로 사옥을 확장 이전하며 사업을 본격화했다. 2002년 철탑산업훈장 수상, 2005년 전통산업 선정, 2013년 경북도 향토뿌리기업 지정 등 황남빵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황남빵의 비밀: 팥과 장인 정신

     

    황남빵의 매력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단연 팥이다. 황남빵은 전체의 약 70%가 팥앙금으로 채워져 있어, 한 입 베어 물면 진하고 부드러운 팥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진다. 특히, 황남빵은 100% 국산 팥만을 고집한다. 2011년부터는 경주 지역 농가와 계약 재배를 통해 지역 특산 아라리 품종 팥을 사용하며, 지역 경제와 상생하는 모델을 만들어갔다. 팥값이 치솟아도 수입산을 쓰지 않는 이 고집은 황남빵의 품질을 지키는 핵심이다.

     

    두 번째는 수작업이다. 황남빵은 기계 생산이 아닌, 장인들의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진다. 반죽을 깍두기 모양으로 자르고, 팥소를 감싸며, 국화 문양을 찍는 모든 과정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이 수작업은 황남빵의 부드럽고도 쫀득한 식감을 완성한다. 게다가 방부제나 인공 감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 갓 구운 황남빵은 실온에서 3~4일만 보관 가능하다. 이 점이 오히려 황남빵의 신선함과 정직함을 증명한다.

     

    원조 논란과 세 갈래의 황남빵

     

    황남빵의 성공은 수많은 모방자를 낳았다. 경주 시내를 걷다 보면 “경주빵”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한 블록마다 보일 정도다. 하지만 황남빵의 정통성을 잇는 곳은 단 세 곳뿐이다: 최영화빵, 황남빵, 그리고 이상복명과. 이 세 가게는 모두 최영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최영화빵:

    최영화의 맏손자가 운영하며, 80년 전통을 이어가는 곳. 원조의 맛을 가장 충실히 계승했다고 평가받는다.

     

    황남빵:

    최영화의 둘째 아들 최상은이 키워낸 브랜드로, 현재 가장 큰 규모와 인지도를 자랑한다. 본점은 경주 태종로에 위치하며, 관광객들로 늘 북적인다.

     

    이상복명과:

    최영화의 수제자였던 이상복 장인이 운영하는 곳. 14세에 황남빵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최영화로부터 직접 간판을 허락받았으나, 상표권 분쟁으로 인해 한때 경주를 떠났다가 1998년 다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빵을 만든다. 강원도 청정 팥을 사용해 독특한 풍미를 자랑한다.

     

     

    이 세 곳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며 황남빵의 명맥을 잇고 있지만, 공통점은 최영화의 철학을 계승한다는 점이다. 반면, 일반 “경주빵”은 가격은 저렴하지만 품질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일부 가게에서는 중국산 팥을 사용하기도 해, 황남빵 특유의 깊은 맛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의 황남빵: 경주의 자부심

     

    2025년 현재, 황남빵은 경주를 대표하는 기념품이자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디저트다. 황남빵 본점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갓 구운 따끈한 빵을 맛보려는 이들로 늘 긴 줄이 이어진다. 가격은 개당 1,200원으로, 20개 24,000원, 30개 36,000원에 판매된다. 비싼 편이지만, 그만큼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신선함과 품질이 보장된다.

     

    황남빵은 단순한 빵이 아니다. 최영화의 도전, 최상은의 혁신, 그리고 지역 농가와의 상생까지, 경주의 지난 80년이 담긴 시간 캡슐이다. 갓 구운 황남빵을 한 입 베어 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곁들이면, 그 달콤함 속에서 경주의 이야기가 조용히 들려오는 듯하다.

     

    경주에 간다면? 황남빵 본점이나 최영화빵, 이상복명과를 찾아 따끈한 황남빵을 맛보길 추천한다. 그리고 그 작은 빵 한 조각에 담긴 깊은 역사를 잠시 떠올려보자. 경주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사람들의 손때가 함께 구워낸 그 맛은 분명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참고: 황남빵을 더 맛있게 즐기는 법

     

    • 보관법: 실온에서 2~3일, 냉장 보관 시 5~7일. 전자레인지에 10~15초 데우면 갓 구운 맛이 살아난다.
    • 궁합: 따뜻한 녹차나 우유와 함께 먹으면 팥의 달콤함이 더욱 돋보인다.
    • 팁: 본점 방문 시 “갓 구운 빵”을 요청하면 바삭한 겉과 촉촉한 속을 바로 즐길 수 있다!